달빛을 훔치고 피었을까?
한라감자난초
아가야 손톱만큼씩 자라나기 시작하는 생명의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하는 이른 봄입니다.
햇살은 맘껏 빈 가지 사이를 뚫고 대지로 내려와 마냥 뒹굽니다. 햇살이 뒹굴고 간 자리에는 새 생명이 탄생합니다. 기다란 이파리가 양팔을 벌리고 햇살을 맞이합니다. 주름이 깊게 나있어 멋없어 보이는 이파리만 봄바람에 나들이 나온 듯합니다. 저 이파리는 이다음에 자라서 무엇이 될까?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꿈도 없이 그저 무의미하게 양팔을 벌리고 있는 것일까? 이파리를 보아서는 그다지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듯이 이파리는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겸손한 미덕입니다.
노루의 발걸음 소리에도 산새들의 지즐대는 소리에도 유혹하는 봄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여름을 향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이미 여름날에 감자난초의 꿈은 알알이 씨방을 맺히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감자난초를 보지 못한 채, 여름을 훌쩍 보내 버렸습니다. 환한 보름달 한가위가 환하게 비추더니 감자난초의 꿈을 보여 주려나 봅니다. 며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냉기가 도는 울창한 숲으로 갔습니다.
어느새 푹푹 찌는 더위는 달아나버리고 냉한 기온이 서늘하게 숲을 휘감고 있습니다. 이런 곳은 숨골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자연의 숨골인 셈입니다. 자연의 숨골 덕분에 늦게나마 귀하디 귀한 난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자연입니다. 감자난초는 뿌리가 감자처럼 생겼다 하여 감자난초라 합니다. 역시, 한라감자난초의 뿌리도 감자처럼 생겼습니다.
한라감자난초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작은 꽃잎은 마치, 달빛을 훔치고 피어난 달의 요정처럼 신비롭습니다. 고요한 숲 속에서 달의 요정이 남몰래 내려왔나 봅니다. 달빛을 훔치고 피었을까요? 하얀 입술 위에 박힌 자갈색 반점은 꽃의 언어, 속삭이는 한라감자난초의 사랑의 밀어가 들리세요?
복수초 꽃망울이 활짝 열리던 날
얼어붙은 대지는 꿈틀거리기 시작하며
양팔을 벌리고 일어서는 푸른 깃발,
오색딱따구리 둥지를 트는 소리에
한 뼘씩 자라나는 꿈이여,
도란도란 꿈꾸는 숲 속에서
여물어가는 부푼 가슴,
꽃망울이 톡 터지며
달빛을 훔치고 왔네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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