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이야기

가을 자락으로 스며들다

제주영주 2006. 10. 31. 13:52

 

 

 


들판은 은빛 물결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갈햇살에 부서질 듯 한 은빛 출렁임이 끝없이 갈바람에 흐느적거리며 깊어가는 가을을 예찬하듯 은빛 갈채를 보내오는 길을 지날 때마다 탄성을 질렀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일 테지요?

부드러운 바람 곁을  손끝으로 만져 보는 것, 고운 햇살이 보드랍게 억새꽃 이마마다 입맞춤을 하며  살며시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일, 매서운 바람의 질책에도 꺾이지 않고 살아가는 일,

살아 있다는 것은 이래서 좋은가 봅니다.

 

뉘엿뉘엿 땅거미가 지는데도 마냥 좋다고 탄성을 지르면서 팔딱이는 은빛 지느러미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차를 세우고 고운 햇살과 입맞춤을 하고 있는 억새의 숨결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은빛 지느러미들이 갈바람에 펄떡이는 가을입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가을 향기를 온종일 맡으며 이 오름 저 오름으로 누비고 싶었습니다.

가을꽃 속에 파묻혀 살며시 웃음 지어보고 싶었습니다.

가을 향기 속으로 스며들었으나 이내 속절없이 가을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마는 가을 향기에 갈증은 심해져만 갔습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은빛 억새꽃밭에서 키스를 하고 싶다고 그런데 키스할 사람이 아직은 생기지 않아서 서럽게도 올 가을을 보내야 한다고, 아, 그렇게 가을은 가고 있나 봅니다.

가을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러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꽃도 한없이 보고 억새 물결 속으로 거닐 수 있는 오름으로 향했습니다.

 

 

 

 

통오름은 꽃밭 오름이라 칭송할 만큼이나 가을이면 아름다운 꽃들로 오름을 장식합니다.

 가을이면 가고 싶은 오름, 보랏빛 꽃으로 장식하는 오름입니다.

작년 가을날에도 재작년 가을날에도 통오름에는 보랏빛으로 소담스럽게 피어 가을을 예찬하듯 꽃물결로 출렁거렸습니다.

 

아기 무덤가마다 아기처럼 자그마한 꽃들이 피어나 아기의 영혼을 달래주는 듯 가을꽃이 시린 눈빛은 그 어느 오름에서 피어나는 꽃보다 한층 예쁜 모습입니다.

 

통오름의 꽃들은 아기천사를 위해서 피었나 봅니다.

아가처럼 자그마한 키에 천진스러운 웃음이 시리도록 눈부십니다.

 

 

 

 

 

 

 

보랏빛 꽃향유들이 앞을 다퉈 꽃을 피우는가 싶으면 개쑥부쟁이들이 하늘 바라기로 눈부시도록 피어납니다.

 

 

 

 

자그마한 층층잔대, 한 뼘도 되지 않는 고사리삼, 자주쓴풀, 외로운 듯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에 귀기울여 봅니다.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또는 죽어가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표출입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이 청자 빛으로 은은하게 울려 펴집니다.

또는

죽은 자의 눈물처럼 시린 눈빛으로 피어나기도 합니다.

 

 

 

 아기 무덤에 핀 고사리삼 한 뼘도 채 되지 않습니다.

포자가 샛노랗게 알알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곧 황금빛 희망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황금빛 희망은 대지의 입맞춤으로 싹을 틔우게 됩니다.

 

 

 

 아기의 영혼을 닮은 작은 꽃이 피었네요.

시린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네요.

 

외로운 듯 서러운 듯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은 잃지 않습니다.

아장아장 걸어서 가을 오름 자락을 비벼대며 싹을 틔웠습니다.

황금빛을 받으며 꽃잎을 여는 자주쓴풀이 사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