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을 닮은 '억새꽃'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김재규의 詩 '가을의 노래'처럼 가을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집니다. 황혼이 질 무렵이면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도 텅 빈 허전함이 몰려 오기도 합니다. 들판에서 외롭게 노래하는 은빛 억새처럼 하얗게 울고 싶어집니다.
황혼이 물들면 가을은 사르르 녹아내릴 듯한 부드러운 음색으로 속 울음 삼키듯 가을바람에 실려 하염없이 서걱거립니다. 속 울음 삼키다 토해내는 억새꽃의 하얀 눈물이 처연하기만 합니다.
억새꽃은 제주인을 가장 많이 닮은 꽃입니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의 섬 제주에서 강인하게 살아가는 억척스러움과 속 울음 삼키며 세월을 이겨내던 우리네의 어머님들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가을이면 어욱(억새의 제주어)을 베어다 겨울 용 땔감으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볏짚 대신 지붕을 덮는 이엉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억새가 갓 봉오리를 형성할 때면 어욱 삥이라 하여 뽑아서 먹었던 그 시절, 그 때마 해도 먹을거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억새는 제주인의 삶과 가장 친숙한 들꽃으로 제주를 대표하는 가을 들꽃입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주는 곳마다 "어서 오세요." 하얀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억새꽃은 가을이면 제주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억새는 벼과에 속하는 다년초 식물입니다. 억새 종류만 해도 십여 종이나 됩니다.
한라산에서 가장 먼저 피는 참억새, 금빛으로 피는 금억새, 물가나 습지에 사는 물억새 등 억새종류도 다양합니다. 그 다양한 억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제주의 가을은 한층 깊어만 갑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가을날 은빛 출렁임이 끝없이 일렁이는 제주의 들녘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제주의 가을을 예찬하듯 "어서 오세요." 하얀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억새꽃 속에 묻혀 제주의 완연한 가을 속에서 마냥 걸어보아도 좋겠습니다.
살구 빛 언덕에 걸쳐 놓은/너의 애태우는 그림자/끝자락이 붉어 슬프다
가을 편지들이/은빛 지느러미처럼/가을 들녘을 휘젓고 다니다/돌아오는 길목,
눈시울이 붉어지며/기다리는 마음은/들국화도 아니고/개망초도 아닐 것이다
너를 닮은/꼭 너를 닮은/억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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