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아름다운 길

호젓한 가을 숲길을 걷다.

제주영주 2008. 11. 1. 20:28

 -詩가 흐르는 가을 숲길-

 

가을이면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날이 저물도록 거닐고 싶지만, 어느새 내 마음엔 조급함이 생겨 서두리게 됩니다. 그 무엇에 쫓겨 살아가는 것처럼 이유도 없는 성급함이 늘 앞섭니다.

 
곱게 물든 단풍잎 사이로 내리쬐는 갈햇살 한입, 스산한 갈바람 한 줌 가슴에 담고 거닐다 우연히 물가에 비친 가을풍경을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색으로 물든 숲으로 들어섰습니다.

 

오색으로 하늘을 삼켜 버린 숲, 우두커니 서 있는 오름을 끌어안고 살아온 세월은 몇 년이었을까? 파란 하늘 대신 나풀거리는 단풍잎으로 하늘을 가려 나그네의 마음을 치유하는 저 빛깔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화려한 단풍잎을 보더니 동심으로 돌아가 곱게 물든 잎을 줍기도 합니다. 낙엽은 포근한 마음의 안식처로 감싸 안습니다.

 

화려하게 차려 입은 단풍잎이 소슬바람에 힘없이 내려앉습니다. 무거웠던 마음을 비우듯 가벼이 내려앉는 낙엽을 밟으며 지나온 어제 일을 후회하기도 하고 다가올 내일을 염려하기도 합니다.

 

나무는 가장 지혜로운 식물입니다. 싹을 틔우고 녹 빛으로 제 몸을 가려 놓더니 끝내  버려야 할 것을 과감히 버리며 모든 지혜를 뿌리로 옮겨 놓습니다.

 

어느새 숲은 삼켰던 하늘을 토해내더니  드넓은 고산습지인 '숨은 물뱅듸'가  펼쳐집니다. 땅 속에 숨은 물이 있다하여 숨은 물,  뱅듸는 넓은 들판을 의미하는 제주어로 ' 숨은 물뱅듸'라 합니다. 이 곳은  내년에 생태 숲으로 조성됩니다.

 

습지에는 청빛의 하늘우물을 담아내고 있는 용담꽃과  아그배나무,  꽝꽝나무, 솔비나무 등이 눈에 띕니다.

이러한 현상을 현원학 선생은 육화(陸化) 형성이라며 습지의 중요성을 인식시킵니다. 

습지의 육지화는 습지에서만 사는 생물들의 멸종을 의미하며 생태계 먹이 사슬의 단순화 되면서

환경의 파괴 등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숨은 물뱅듸를 지나 다시 가을 숲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봄이라면  시가 흐르는  가을입니다.  생각나는 시 한 줄 없어도 가을 숲길은  아름다운 시어들이 알알이 맺혀 나그네의 마음에 영혼의 샘으로 흐르게 합니다.

 

밤새도록 읊어대던 시는 한줄기 바람으로 사라져 가고 눈물처럼 피어나는 영혼의 꽃이 시가 되어 가을 숲을 장식합니다.

 

가을 숲길은 내게로 이르는 길입니다.

궁색했던 자신이지만 가을 숲길에서 만나는 자신은 가장 숭고합니다.   갈바람을 마시며 자연의 숨결 속에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물가에 비친 가을 풍경 너머로 깊은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숨어 있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고여 있는 물일지언정, 얕은 물일지언정  가을 숲 속을 품고 있는 물은 영혼의 샘물입니다.

 

알록달록 단풍잎으로 물 위를 깔아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으나 한줄기 바람이 스쳐지나가면 나뭇가지의 흔들림과  채 떨어지지 않은 시어들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립니다.

 

아, 가을은 영혼으로 이르는 길, 타들어가는 목마름에 샘솟는 젖줄, 밤새 내리는 빗줄기에 영혼을 적셔  빛나는 단풍의 빛깔을 마시며 호젓한 가을 숲길을 걷습니다.

 

꽃향기나는 봄이라면 영혼의 촛불을 켜는 가을입니다.

자줏빛으로 출렁이던 억새꽃마저 어느덧 갓 털을 털어내고 공허한 마음으로 흔들어 댑니다.

하얗게 싸라기눈이라도 내려앉듯이 흔들어대는 억새풀의 상념에 깊어만 가는 가을 녘입니다.

 

밤새 내린 서릿발을 머리에 이고 몸부림치는 가을들판에서 촛불 켜는 가을, 내  마음에도 촛불을 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