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분 하나 되어/겨례의 혼부를 때/ 누 저바다 잠재우고/ 저하늘 가릴 수 있었으랴/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온 누리에 차고 넘쳤거니’-3.1독립운동기념탑기념탑 비문에서
올해로 3.1절 92주년을 맞는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의 혼이 깃든 조천으로 향했다. 서릿발에 얼어붙은 매서운 바람이 몰아친다. 숨조차 몰아쉬기 힘든 매서운 바람이 길을 막는다.
막바지 동장군의 기세에 세상은 하얀 설의를 갈아입고 강직한 선비처럼 고결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평화를 위해 길을 나서야 할 것이다. 선열들의 희생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한다.
그날의 함성이 들여오는 듯 만세동산에도 고결한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행렬처럼 순백의 눈이 한없이 흩날린다.
조천만세동산에는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3.1독립운동기념탑과 제주항일기념관, 평화를 염원하는 ‘애국선열추모탑’과 제주출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의 위패를 봉안하는 재단인 ‘창열사’가 있다.
또 독립유공자를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제주항일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조천 미밋동산에서의 3.1만세운동은 서울보다 20일 늦은 3월 21일 14명의 결사대를 중심으로 4일간에 걸쳐 독립만세를 외치며 항일운동을 벌였던 곳으로 민족의식을 불어 넣은 계기가 됐다.
격렬하게 벌어진 만세운동은 곧바로 서귀포로 전파됐고 제주해녀항일운동에 많은 영향을 준 시발점이 됐다. 이후 만세운동이 전개된 미맛동산을 조천만세동산이라 부르게 됐다.
#역사가 숨쉬는 유서 깊은 마을길을 따라
항일정신이 투철한 조천은 이외에도 연대, 연북정, 비석거리가 있으며 고가옥이 잘 보존돼 있는 곳으로 문화 유적지임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 마을이름의 유래는 임금님께 인사드린다. 또는 조공(朝貢)이 이곳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조천’이란 명명됐다고 한다.
조천리의 옛 이름은 조천관(朝天館)이었다고 한다.
조천관(朝天館)은 육지를 왕래하는 명사나 귀빈들이 머무르거나, 제주산 마필 등 조공품 또는 생필품을 육지로 보낼 때 공무를 보던 곳으로 부산.인천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관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이곳은 육지와 제주를 잇는 교통중심지로 번창했던 곳이다. 조천포구에 닿을 지점, 조천진성의 성벽 안에 복원된 연북정(戀北亭)이라는 정자가 바다로 나가 앉은 듯 하늘로 향할 듯 솟아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 망루에 서게 된다.
연북정은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돼 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연북정 바로 옆에는 자연의 선물인 용천수가 있다. 여탕, 남탕으로 나눠진 이곳 노천탕은 수량이 풍부함을 자랑하듯 콸콸 샘솟고 있다.
노천탕을 벗어나 조천해안도로에 위치한 조천연대를 통해 그 당시의 문화상을 엿볼 수 있다. 통신수단이었던 연대는 주로 봉수대와는 달리 해변지역에 설치돼 있다.
이곳 연대는 동쪽으로 왜포연대, 서쪽으로 별도연대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곳이다. 조천연대를 지나면 조천환해장성과 불턱 등 제주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해안도로로 조천과 함덕을 잇고 있다.
정우찬(57) 이장은 “제주에서 3.1만세운동을 최초로 불사른 조천은 역사와 자존의 고장”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 이장은 “제1관문을 자랑할 만큼 번창했던 조천에는 아쉽게도 대중목욕탕이 없어 지역주민들이 함덕이나 삼양 등으로 나가야 한다”며 “이는 조천의 경기가 약화되는 원인 중의 하나“라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주민들의 편안하고 부담 없이 장례식을 치룰 수 있도록 마을자체에서 복지사업으로 장례식장을 운영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제1우회도로에 이어 제2우회도로가 착공되면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 조천은 점점 낙후된 마을이 될 것”이라며 우려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장, 조천을 알리기 위해서는 제주의 역사. 문화의 길 걷기 프로그램 등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제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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