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 속 이야기

별빛보다 더 많은 불빛속으로

제주영주 2006. 8. 27. 23:37


산철쭉으로 붉게 물드는 오월의 한라산 산행을 접어두고 서울로 갔습니다.

파릇파릇 무성해지는 긴 행렬의 은행나무들과  잎 넓은 플라타너스들이 제법 무더워지는 하늘을 덮어가는 서울의 풍경은 아이보리빛깔 아카시아꽃으로 물들어가는 도심 속의 산을 지나 회색빛 빌딩 숲 사이로 초록빛깔의 바다를 연출하기라도 하듯이 자그마한 들녘이 싱그럽게 펼쳐집니다.


가을이란 기다림 속에 푸르름으로 키워가는 도심 속의 한 모퉁이엔 전원생활을 느낄 수 있는 작은 논밭이 펼쳐지고,  온통 잿빛 하늘 아래서도 바람결에 싱그러운 몸짓으로 출렁이는 이파리에 한껏 힘이 솟구칩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석양을 등지고 도심 속으로 피로에 지친 몸을 싣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차츰차츰 별빛보다 더 많아지는 네온사인들이 하나 둘씩 불 밝히는 화려한 서울의 밤은 별빛보다 더 많은
광채를 내며 반짝이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밤은 왠지, 나그네의 마음엔 더욱더 허전하게 느껴지는 바람 같은 불빛으로 출렁거립니다.


바람 같은 불빛 속에서 하루의 피로가 덜 풀린 채  다음날 아침, 짬을 내서 찾아갈 곳을 찾아 보았습니다.

 

세종대에서 가까운 곳은 덕수궁(경운궁)과 시립미술관으로 그중에서도 제일 가까운 곳을 선택하여 덕수궁으로 가보았습니다.

 


대한문으로 들어서자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꾸며진 금천교를 지나 중화전과 왕과 왕비의 침전이었던 함녕전, 편전 격인 덕홍전을 빼면 궁궐이라 보기는 공원 같은 느낌이 들 만큼 아담한 궁궐, 광해군이 인목대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곳 '석어당',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이 있으며, 고종의 초상화가 봉안된 '궁중유물전시관'에 들어섰습니다.


마룻바닥에서 들려오는 발자국이 묵직한 고요함을 깨우며, 마치 고종이 벌떡 일어 날것만 같아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사뿐히 조심스레 고요한 적막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국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묵직한 적막감은 여전합니다.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근대미술관으로 들어가자 클래식과 함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숨죽이듯 고요함 속에 들려오는 내 발걸음 소리에 여간 신경 쓰입니다.


작품을 감상하고 나오자 하늘을 향해 뿜어대는 작은 분수대가 시원스레 펼쳐지고 바로 옆에 있는 등나무 그늘에서 커피를 마시며 피로에 지친 발을 쉬게 했습니다.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꽃 무더기들이 푸성귀 이파리들 사이로 나의 시선을 끈 마로니에의 이파리는 일곱 개의 잎이 손바닥처럼 모여 하나의 잎을 이루고 있으며 꽃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에게 선물한 마로니에 그날 처음 말로만 듣던 마로니에 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온다면 마로니에 공원에도 가 볼까 합니다.

 

뒤뜰 정원 벤치에 앉아 찔레꽃향기를 맡으며 휴식을 취하는 노부부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노후에는 그렇게 서로 등을 의지하며 주름진 세월마다 정이 듬뿍 쌓아 정겨운 웃음으로 말을 건네는 노부부의 모습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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