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쌓여간다. 깊어 가는 가을, 계절은 어김없다.
낙엽 밟으며 늦가을 속으로
▲ 천아오름은 이름에 걸맞게 커다란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소나무와 각종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은빛 너울대는 억새 들길 따라 가을의 끝자락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늦가을의 정취에 젖는다. 제1 산록도로변에 있는 천아오름은 신엄공동목장안까지 시멘트 포장길이 개설되어 있다. 천아오름 초입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주변에 학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소나무 꼭대기에 앉더니 차 소리에 파드득 날아 가버린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되어있어 쉽게 차로 갈 수 있으나, 그동안 너무나 급하게 정상만을 향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천아오름 표지석 곁에 주차를 하여 걷는다. 표지석에서 오름까지는 4km 정도.
정상으로 가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듯이 그 주변의 환경을 천천히 살피며 걷는다. 오름을 향해 가는 것은 오로지 정상을 향해서 가는 것만은 아니다. 인생도 그러하다. 오로지 정상을 향해서 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듯이, 느긋한 마음으로 소풍을 가듯이 쉬엄쉬엄 오르다 보면, 길섶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작은 풀꽃들을 만나게 된다. 작은 풀꽃들의 주는 기쁨을 누리면서 느긋하게 오른다. 길섶으로 마중 나온 노란 산국 향기에 가을은 깊어가고 어느새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라산 정상에서부터 내려오는 불꽃놀이가 들녘까지 활활 타오르는 늦가을이다. 연하늘빛 쑥부쟁이, 보랏빛 엉겅퀴, 붉게 물든 천남성 열매가 풀섶 사이로 빨가니 타오르고 있다. 목장 안으로 들어서면 천아오름이 눈에 들어온다. 목장 안에는 느긋한 소들의 여유로움으로 가득 차다. 숲은 겨울로 가기 전에 봄을 알리는 제비꽃을 철없이 피워내고 있으니, 혹독한 겨울을 어찌 이길까 걱정이다.
수북이 쌓여가는 낙엽, 가을바람이 스치고 가면서 낙엽들이 휘날린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속에 살포시 누워 가을의 향기에 젖어 든다. 한라돌쩌귀 꽃잎이 어느새 지고 덩그러니 이파리만 남아 있다. 가을을 보내고 이제 겨울을 맞이해야 한다.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김현승의 ‘가을’ 시처럼 이제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때가 왔다. 이 가을에 한 편의 시를 읊어보자.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또는 들국화 향기 짙게 풍겨오는 가을들녘에서 또는 은빛 억새물결 속으로 가을의 노래를 부르거나, 입안으로 가을, 가을이라고 읊어본다. 그러면 가을은 어느새 내 안에 그윽한 향기를 안고 달려온다. 그리곤 가을을 보내고 이제 하얀 겨울을 맞이하자.
천아오름은 비고 87m, 둘레 1,439m로 남쪽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패어있는 말굽형 화구를 이루고 있다. 커다란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소나무와 각종 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참나무와 낙엽활엽수의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는 오름이다. 남쪽 봉우리에서 바라보면 어승생악이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말굽형인 굼부리 안으로 들어가면 보금자리 마냥 아늑하다. 거친 나무껍질에 파릇파릇 묻어나는 이끼, 몇백 년을 살아온 나무의 고뇌가 풍겨온다.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늦가을의 정취를 더해준다.
가을의 소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가을,
꽃물결 사이로 보드라운 햇살
속살거리며 고웁게 물드는
가을의 소리
은빛 물결 고웁게 울려 펴지는
메아리 소리
오름마다 넘실거린다
누구에게로 보내는 사연일까
뜨거운 심장의 박동소리
가슴 뜨거운 연서들이
이 가을에도 타오르며
붉게 물들어간다
200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