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오로지 화려하게 물드는 것만이 아니다.
6성판악 매표소에 도착하니 6시 40분.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붐비지는 않는다. 고요 속에 젖어 드는 산길에는 뽀얀 안개가 슬그머니 발아래로 내려와 살포시 적신다. 시야를 가린 안개 숲은 조용히 새벽을 연다. 우리는 숲에 무엇을 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다. 오로지 숲으로부터 받기만 한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나무들은 조용히 아침을 맞이한다. 흙내음, 낙엽 내음, 맑은 샘물로 산을 찾는 이들에게 촉촉이 젖은 이끼처럼 파릇파릇한 생명을 주는 고마운 숲. 가을 산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살며시 부는 바람에도 기운 없이 내려와 앉는 낙엽들로 쌓여만 가는 가을 숲. 싱그럽게 청록빛으로 살아온 젊음을 기꺼이 바쳐 이제 노을빛으로 물든 황혼의 계절에서 아낌없이 자리를 내주며 떠난다. 고운 빛깔 단풍잎들이 팔랑거리며 서로에게 작별 인사를 나눈다. 서로서로 고마웠다고 그동안 힘껏 살아왔다고 활짝 웃는 단풍잎들이 곱다. 수북이 쌓여가는 낙엽을 밟으며 산길을 걷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단풍처럼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떠날 수 있을까? 서로에게 고마웠다고 인사를 나누면서 떠날 수 있을까….
고요 속의 숲을 깨우는 것은 스치는 바람에 후드득 떨어지는 이슬방울과 산을 찾는 이들이 웅성거림만이 숲속을 가득 채운다. 숲이여! 빨리 일어나라! 그리고 뿌옇게 스며드는 안개 자락을 걷히게 해다오! 햇빛 가득 찬 백록담을 열어다오! 작은 희망을 걸며 한발 한발 내디뎠으나, 백록담은 안개 호수로 가득 넘쳐난다. 정상은 한겨울 한파가 몰아치듯이 차디차기만 하다. 그 차디찬 속에서도 꽃은 피고 지고 있다. 한 떨기 꽃으로 피어난 눈개쑥부쟁 꽃들이 안개비 속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며, 가을을 축복하듯 해맑은 웃음으로 선사한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산다는 구상나무 숲길로 접어든다. 숲으로 에워싸여 있는 길은 포근하다. 아름다운 숲길, 관음사 코스로 하산을 한다. 곱게 물든 마가목 이파리들이 붉게 물들어 가을을 환영하고 아가야 손처럼 펼쳐 든 단풍잎, 노랗게 물든 생강나무 이파리,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섬매자나무의 빨간 열매는 산수유처럼 단풍보다 더 붉게 가을을 태우고 있다.
가을은 오로지 화려하게 물드는 것만이 아니다. 숲 한 편에서는 휑하니 텅 빈 겨울처럼 쓸쓸한 회색빛으로 물든 고채목과 갈색으로 물든 호장근이 고독함을 더한다. 이렇게 한라산의 가을은 화려하면서도 엄숙하게 조용히 가을을 태운다.
화려하게 물든 단풍 숲길, 누런 낙엽들이 쌓여만 가는 숲길, 누런 솔잎들이 쌓여가는 숲길, 흙내음이 넘쳐나는 숲길, 이끼로 덮인 계곡, 바스락거리며 스치는 조릿대 숲길을 힘겹게 내려오니 청잣빛 한라돌쩌귀가 반긴다. 그 고운 청잣빛으로 물든 한라돌쩌귀 꽃이 피로에 지친 다리를 살살 풀어준다,
200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