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이야기

어여쁜 나도옥잠화

제주영주 2007. 6. 7. 20:02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비를 맞으며 랜턴 불빛만을 의존해 산길을 올랐습니다.

그림자도 숨어버린 칠흑 같은 산길은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며 깊은 장막을 깨우는 산물 소리에 가끔 철렁 내려 앉기도 했습니다.  뒤척이며 흘러가는 산물도 나처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밤새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을 것입니다.

 

꽃님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무서움도  사라지고 힘이 절로 솟구칩니다.

 그를 향해 가는 마음에는 거짓 없이 때묻지 않는 마음으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어디선가  산나그네와의 만남을 기다리며  흘러가고 있는 산물의 깨끗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눈맞춤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만을 생각하며 가야 하는 발걸음에는 무겁게도 세상사 시름을 실어 놓았으니 헉헉거리며 산길을 올랐습니다.

 

칙칙했던 어둠을 뚫고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산길은 조금만 오르면 정상에 서게 되는데도 왠지 무거운 발걸음을 쉽사리 옮겨놓기 힘이 들었습니다. 무거운 세상사 이야기를 가득 싣고 왔기 때문인가 봅니다.

 

아, 어딘가에 훌훌 벗어 놓고 가야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운무에 내려놓아도 좋으련만, 산길에 벗어 놓아도 좋으련만, 자꾸만 무겁게 짓눌리는 세상사 이야기를 안고 가야하다니 그 짐은 두 배로 무거워져 갔습니다.

 

깊은 심호흡을 해도 쉽사리 내려놓지 못하는 무거운 세상사 이야기….

새벽을 깨우는 산새소리에 조금씩 가벼워져 갔습니다. 그러다 첫눈을 마주친 나도옥잠화의 하얀 꽃잎에

무거운 짐들을 훌훌 벗어 놓았는지 어느새 그를 만나고 나서는 새털처럼 날아오를 수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밤새 내린 비에 흠뻑 젖은 꽃잎, 살며시 고개를 숙인 수줍음과 난처럼 고고한 품위를 지닌 아름다운 꽃, 나도옥잠화입니다.

구상나무 숲 아래  있는 듯 없는 듯 피어나는 아름다운 들꽃의 순수함에 나도 모르게 그 무거웠던 짐을 훌훌 벗어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떠오르는 붉은 정열의 불덩어리를 보지 않아도 그가 내 앞에 있음으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청초한 하얀얼굴,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는 한 떨기 나도옥잠화 앞에 한참이나 머물었습니다.

강열한 빛이 내리던 날에는 그의 고운 하얀 얼굴을 어여쁘게 담을 수 없어 안타까움이 많았으나,

청초한 순수함을 담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이슬비에 젖은 풀잎의 싱그러움과 고요한 새벽을 깨우는 산새의 노랫말이 흩어져 갈 즈음 자그마한 풀꽃과의 눈맞춤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주변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이 고맙고 사랑스러움을

다시금 느껴 봅니다.

 

꽃을 쫓는 눈먼 사람이 되지 말자고 꽃을 좇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꽃처럼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내다보고 꽃처럼 품을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가져보자고 다시금 혼잡한 마음을 추슬러봅니다.

 

작은 풀섶에 맺힌 이슬 한 방울처럼 영롱하게 빛날 수 있는 추억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나와의 스치는 그 모든 것을 더욱 사랑하고 소중함을 간직해야 한다는 초심으로 돌아가 봅니다.

 

자그마한 풀섶의 인연이라도 이슬 한 방울의 눈물도 소중함을 다시금 새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