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이야기

할미꽃이 피었네요!

제주영주 2007. 3. 11. 22:43
  우리네의 할머니를 닮은 꽃, 할미꽃

 

 

 

 

일찍이 완연한 봄빛으로 들녘을 흔들어 깨워 놓고는  소리없이 봄의 노래가 팔랑거리고 있는데도 나는 성큼 봄과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노래가 어느 날 겨울 속에 갇혀 버렸습니다. 내 안에 겨울이 숨어 있었던 탓입니다.

 

칼바람을 앞세우고 갇혀 놓지도 않았것만,  설의를 입고 한라산 백록담 속에 숨어 버린 것도 아니었것만,

어느 날부터인지 봄꽃의 노랫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봄은 일찍이 겨울보다 앞서 달려와 빛의 노래로 살포시 웃고 있는데도  나는 그들을 성큼 받아 주지 못했습니다.  봄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분주하여도 나는 봄 속에 겨울 속을 걸어야 했습니다.

내 영혼의 노래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냈습니다. 언젠가는 영혼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봄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분주하여도 영혼의 노래가 들려 오지 않는 한, 나 역시 봄 속에 겨울 속을 걸어야 했습니다.

 

바람의 속삭임과 산새들의 종알거림 속에는 노루귀도 피었네! 보춘화도 피었네! 그것만이 아니라네,

나뭇가지에는 어느새 초록의 움트는 소리로 요란하다네!  부드럽게 속삭여 주었지만,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겨울 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의 노래가 겨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드디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아름 피어난 보춘화와의 눈맞춤으로 영혼의 물꼬가 터졌을까요?

아니면, 가는잎할미꽃과의 눈맞춤으로 영혼의 물꼬가 터졌을까요?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예전처럼 들꽃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습니다.

봄빛으로 다가온 엷은 날갯짓의 영혼이 들려옵니다.

내게 음악은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단비입니다.

음악이 없는 세상에서는 나는 그 어떤 글도 쓸 수 없으니까요.

만약에 글을 쓴다 해도 그것은 형식적인 단어들의 조합일 뿐일 것입니다.

연주곡에 빠져서 나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합니다.

맑은 영혼을 깨우는 연주곡을 들으면 나는 금방 헹궈낸 새하얀 빨래처럼 눈부시게 살랑이는 바람에 춤을 춥니다.

슬픈 연주곡을 들으면 내 영혼은  슬픔에 잠겨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게 음악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이렇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감동적이며 감사해야 할 일입니까.

연주곡을 들으면서 오늘 만났던 어여쁜 들꽃들을 그려봅니다.

 

 

양지바른 오름에서  칼바람과  맞서 당당하게 웃고 있는 할미꽃을 소개할까 합니다.

할미꽃은 봄 소풍날 유일하게 만날 수 있었던 아름다운 들꽃이었습니다. 민틋한 오름마다 피는 할미꽃은 양지바른 곳에서  봄볕을 쬐고 있는 할머니와도 같지만, 꽃이 지고 나면 백발이 된 할머니의 왜소한 모습처럼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젊은 날의 아리따웠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백발만이 남은 왜소한 할미꽃, 곧 우리네의 할머니의 모습을 보는 듯하지요.

 

 

어린 시절에는 할미꽃을 쉽게 만날 수 있었으나 요즘에 들어서는 예전만큼은 많이 볼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이른 봄날 이렇게 아름다운 할미꽃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아직은  자연보호가 잘 지켜지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과 여러해살이풀입니다. 노랑할미꽃, 분홍할미꽃, 산할미꽃, 동강에서 가장 유명한 동강할미꽃이 있는가 하면,  제주에서 자생하는 '가는잎할미꽃'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특산종으로 우리가 보호해야 할 식물 중의 하나입니다.

 

할미꽃 열매에 덮여 있는 듬성듬성 난  흰 털이  할머니의 머리카락과도 흡사하여 '백두옹', 허리가 구부러져다 하여 '노고초'라고도 부릅니다.

할미꽃은 꽃이 만개하면 고개를 숙이고 있지요. 고개를 꼿꼿하게 받쳐 있기가 힘이든 가봅니다. 구부정한 허리를 굽히고 사랑하는 손녀를 기다리고  있지도 모릅니다. 슬픈 전설이 담긴 할미꽃의 꽃말은 슬픈 추억이라네요. 

 

"바람아, 아무리 칼바람을 앞세우고 봄을 시샘해도 봄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살며시 일러주었지만, 바람은 할미꽃의 아름다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칼바람을 앞세우고 할미꽃을 거칠게 흔들어 놓습니다, 어여쁜 할미꽃은 당당하게 웃어주네요.  봄은 당당한 빛으로 겨우내 움츠렸던 아름다운 꿈들을 펼쳐 놓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