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그리고 나

마법에 걸린 성을 찾아 설국을 향해 가다.

제주영주 2006. 3. 9. 11:10

 

 

마법에 걸린 성을 찾아 설국을 향해 가다.

 

 

성판악에 도착하니 6시 40분쯤, 이미, 주차장에는 많은 대형버스가 세워져 있고, 주차 초과를 이루고 있다. 등산객으로 붐비는 매표소 앞에서 스패츠,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산 준비 완료를 마친 후 설국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뽀드득뽀드득 밟는 긴 행렬의 소리에 어둠의 자락은 조금씩 산산이 흩어진다. 구름에 가린 엷은 빛이 겨울나무들을 일제히 깨우는 아침, 상쾌한 공기가 가슴속 끝까지 스며든다. 이 얼마 만에 맡아보는 새벽 공기인가. 상큼한 나무숲 향기에 젖어 들며, 겨울 산을 향해 오른다. 마음도 눈도 맑아지는 등산로에는 앞도 끝도 보이지 않는 긴 행렬이 이어진다.
온통 새하얀 백설의 길 따라서 오를수록 설국이 펼쳐진다. 마치 하얀 성에 갇힌 숲은 마법에 걸린 듯 고요한 침묵만 흐른다. 나뭇가지 흔들림 없는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수많은 등산객의 발걸음 소리뿐. 뽀드득뽀드득 거리는 발걸음 소리만이 숲속을 가득 채우는 긴 행렬, 오로지 정상을 가기 위해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걷는 발걸음, 인생도 그렇다. 인생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오로지 묵묵히 쉬지 않고 걸어간다.
사라 약수터 마저 숨어버린 겨울 산, 온통 새하얀 눈으로 쌓인 성판악 등산로는 단조로움이 있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그다지 힘든 코스는 아니다. 단지, 9.6km 되는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힘들 뿐.
어느덧 겨울 하늘이 환히 보이는 진달래밭 휴게소. 수많은 등산객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휴식을 취하거나 간단한 식사를 한다. 우리 일행도 한쪽에 앉아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마시며 겨울산을 음미해본다.
이제 남은 능선을 오르면 정상에 서게 된다. 정상을 향해 가는 기쁨, 백록담이여 기다려라!
새하얀 눈 속에 파란 이파리들이 손짓하는 구상나무숲은 깊은 고요 속에 빠져버린 설국이다. 깊은 고요 속에 살짝 바람이 스치며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눈 덩어리, 바람의 흔적의 소리가 가끔 들려온다.
이제 마지막 고비가 남아있다. 계단만 오르면 정상에 우뚝 서게 된다. 정상을 향해 가는 계단에서부터는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한 계단 한 계단 힘들게 오른다. 희뿌연 안개로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다. 운문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세찬 칼바람 소리와 정상에서 외치는 환호성!
드디어 정상. 흐린 날씨 탓으로 백록담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다. 마치 정상은 마법의 성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정상에 오른 등산객들은 마법에 걸린 백록담을 깨우듯 저마다 야호! 야호! 즐거운 환호성을 지른다. 수많은 등산객의 뜨거운 사랑 속에 백록담은 맑고 신비로운 파란 하늘빛을 담아낼 것이다.
슬슬 하산 채비를 한다. 하산하는 길은 미끄럽고 위험이 따른다. 조심조심 한 계단 한 계단 내리면서 지나왔던 흔적들을 돌아보면서 걷는 길. 인생도 그러하다. 정상에 서게 될 때까지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이 오로지 정상을 향해 가지만, 하산하는 인생에서는 여유를 가지고 걸어왔던 지난날의 흔적을 되새겨본다. 또는 앞으로의 남은 인생을 즐겁고 알차게 다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새하얀 솜털 같은 함박눈이 날린다. 참으로 즐거운 산행이다. 깡충깡충 뛰다가 미끄럼도 타고 아늑한 자연 이글로 속에서 잠시 따끈한 차도 마시는 여유로운 즐거움을 즐긴다. 하산하는 길에 겨울 사라악이 보고 싶은 마음에 사라악을 오른다. 아름다운 호수였던 사라악은 온통 새하얀 눈밭으로 변했다. 넓은 경기장 같은 원형의 굼부리. 빙 둘러싸인 나무들의 원을 그리며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듯, 겨울 산속으로 가둬 놓는다. 눈밭에 한참 누워 겨울 하늘을 바라본다. 이 느낌은 춥다기보다는 즐거움이 앞서고 정신이 맑아지며 상쾌하다.
세상은 온통 새하얀 겨울 뿐. 겨울 산속에 묻혀버려도 좋을 듯. 언제 다시 겨울 사라악을 볼 수 있을까? 이처럼 눈이 쌓인 겨울 산행은 행복의 순간이다. 아름다운 사라악이여! 맑고 고운 하늘빛을 가득 담아낼 즈음이면, 맑고 고운 샘물 소리를 따라 다시 찾아오마!
날이 어둡기 전에 하산을 서둘렀다. 오랜 시간 동안 걸어서 그런지 다리는 아려오고 힘이 든다. 더 걸을 수 없을 만큼 다리는 아려오며 피로는 겹쳐온다. 흐린 날씨 탓인지 숲은 금세 엷은 어둠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숲 향기가 솔솔 풍겨온다. 향긋한 숲 향기에 지친 다리를 가끔 풀어주면서 눈길을 걷는다. 뽀드득뽀드득 새하얀 눈길을 밟는 소리가 아직도 아련히 들린다.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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