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어가는 봄 속의 겨울
노꼬메
목장입구에서부터 반겨주는 제비꽃들이 왠지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봄인가 쉽더니 갑자기 어제 내린 눈 때문에 오돌오돌 떨면서 양지바른 쪽으로 어제의 젖은 이파리를 말리고 있습니다.
올 2월에 오르고 나서 다시 노꼬메를 오른 것입니다. 노꼬메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 오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름 자체가 웅장하기도 하고 가파른 오름입니다.
솔 숲길을 지나 자연림이 울창한 오름에는 노루귀, 복수초들이 여기저기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자그마한 꽃이 발목을 붙잡습니다. 가녀린 이파리와 꽃잎을 오므린 채 오돌오돌 떨고 있는 꽃은 꿩의바람꽃입니다.
갑자기 내린 눈 때문일까요? 오돌오돌 떨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추위 속에 오돌오돌 떨면서 이름 모를 풀꽃들이 하나 둘씩 피어나는 봄, 활짝 피어난 개별꽃의 별 노래는 음지 속에서도 희망의 노래로 숲 속의 아기 천사인 것 같습니다. 자그마한 꽃잎으로 희망을 주는 별꽃, 응달진 곳에서도 희망의 소리는 계속 됩니다.
정상에 서니 잿빛 하늘이 낮게 내려와 한라산을 가리고 있습니다. 조릿대 위로 하얗게 내려앉은 봄 속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콧물이 나올 만큼이나 매서운 바람이 차디차게 불어옵니다.
그 차디찬 바람 속에 섰지만, 봄기운으로 힘 솟는 희망의 소리에 기운이 저절로 납니다.
우리는 험한 하산 길을 선택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도전입니다. 남들이 쉽게 가지 않는 길을 선택 할 때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조릿대 위로 하얗게 내린 눈들이 무르익어가는 봄 속의 겨울을 접하게 되면서 하산 길은 매우 가파르고 미끄럽습니다.
여러 번 넘어질 뻔하며 겨우 나무들을 붙잡으며 조심조심 내려왔는데, 푸르른 이끼들이 돋아나는 숲 속에 꼼짝없이 갇히게 됐습니다.
말굽형 화구이며, 분화구 안에는 각종 나무들로 조성돼 있습니다. 감히, 어느 누구도 분화구 안에 접할 수 없을 만큼이나 원시림입니다. 길이 전혀 나 있지 않은 숲 속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돌마다 푸르른 이끼로 돋아나는 숲, 푸른 향기가 솔솔 풍겨나는 숲 속에서 잠시나마 우리는 푸른 이끼처럼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너풀너풀 거리는 푸르른 이파리들이 그늘진 곳에서 기다림을 배우고 있듯이 언제나 조급하지 말고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림을 배워야겠습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푸르른 향기 짙게 풍겨오는 숲 속에서 한참이나 헤맨 끝에 소들이 유유히 풀을 뜯는 목장으로 나왔습니다.
200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