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그리고 나

이승악

제주영주 2006. 3. 9. 12:26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이승악으로 가는 길은 온통 초록빛

 

짙은 초록으로 물든 나뭇잎이 하늘을 가린다. 작은 이파리들이 두 손 가득 진초록의 빛으로 가득 채운다. 5.16도로 숲 터널을 지나는 이들에게 출렁출렁 초록의 물결을 선사한다. 얼룩진 마음을 닦아 내려주는 작은 이파리들이 감사하다. 새록새록 돋아나는 싱그러운 마음으로 가득 채워지는 아침이다. 초록으로 가득 찬 숲길은 언제나 마음을 씻겨 내려주는 청량음료와 같다.

동수교와 논고교 중간 지점 좌측(동쪽)으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서면 표고밭이 나온다, 표고밭 주인아주머니께서 지금 현재 위치에서는 이승악 찾아가기 어렵다며, 신례리 쪽으로 가라고 한다. 하지만 오름을 찾아가는 사람이 쉬운 쪽으로만 선택할 수 있으랴! 온통 우거진 숲속을 거닐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까. 조잘조잘 거리는 계곡물소리에 마음이 빼앗겼을까. 산새들의 노랫소리가 한층 슬프게 들려오는 숲길을 거닐고 싶은 이유였을까. 아니면 고행의 길을 선택하고 싶었을까. 인생의 길이 쉽고 편안하게 가는 것보다는 고행의 길을 걷더라도 내 걸어가는 길이 후회되지 않는다면, 밟는 발자국마다 모두 소중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면, 고행의 길을 선택 할 것이다. 인생이란 결코 쉽게 편안하게 간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을 듯.

하늘을 가린 숲 때문일까. 숲은 온통 저녁 시간대 마냥 어둡고 고요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 가냘프게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정적을 깨울 뿐,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 그곳에 있어야 한다. 나무들이 산이 싫어서 그 자리를 떠나버리면 아름다운 자연이 될 수 없듯이, 풀 한 포기조차 그 자리 그곳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순백의 꽃이 가느다란 바람에 흔들리며 시선을 붙잡는다, ‘한라꿩의다리. 이 식물은 습한 지대, 계곡 등에서 자생한다. 가녀린 한라꿩의다리와 작별을 하고 목적지를 향해 계곡을 지나 다시 숲길을 걷는다. 햇빛조차 비집고 들어설 틈도 없는 숲은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숲은 시간을 초월해 앞서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쭉 내밀고 있지만, 나무 밑 어둠 속에서 자라는 풀섶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빛 한 조각 없는 음지에도 새싹은 돋아나고 '천마'(난초과)가 어둠을 헤집고 고개를 쭉 내밀고 있다. 어디쯤 도달했을까···. 온통 하늘을 가린 숲 때문에 현재의 위치를 분간할 수 없다. 나무마다 끈이 묶여 있다. 누군가 길 표시용으로 사용했다는 생각을 하며 끈의 유인하는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끈이 사라지자 하나의 무덤이 파헤쳐져 있다. 이장을 위해 무덤 쪽으로 가는 길을 표시해 둔 것을 이승악으로 가는 길인 줄 착각했다. 결국, 숲속을 헤맨 끝에 다시 5.16도로로 빠져나와 표고밭 아주머니가 알려준 대로 신례리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신례리 공동묘지를 지나 신례리 공동목장 입구에 서니 안개에 가린 둥그런 오름이 반긴다. 이승이오름이다. 이 오름의 모양새가 '' 또는 ''(살쾡이의 제주어)처럼 생겼다 하여 '이슥이' 또는 '이승이'이라 불린다. 예전에 고양잇과인 살쾡이가 살았음을 연유하여 명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승악 기슭까지 시멘트 포장이 되어있어 쉽게 오름 들머리까지 도착할 수 있다. 이승악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로 나 있다. 오름 전사면에는 낙엽송과 상록수로 어우러져있다. 말굽형인 굼부리 안은 온통 숲으로 우거져있다.

개화를 하지 않은 채 입을 꼭 다문 비비추와 무릇이 풀섶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다. 오름 정상에서 이승과 저승을 생각해본다. 저승의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그 모든 것은 소멸될 것이다. 아름다웠던 날들, 괴로웠던 슬픔, 힘들었던 고난의 길도 모두 소멸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처럼 아무리 괴로워도 저승보다 이승이 나을 것이다.

 

 

이끼 낀 바위틈에

작고 가느다란 다리를 곧추세우고

바람 속에 피어난

순백의 깃털,

어느 누가 알아주는 이 없어도

홀로 계곡을 지키는

꿩의다리여!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바라볼 수 없는 하늘을

한 조각의 빛이라도 내려와 앉을까

내 작은 깃털을 펼쳐 놓으면

한순간만이라도 작은 깃털 위로

한 조각의 빛이 내려올까

영원한 바람을 닮은

작은 깃털을 펼친다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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