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이야기

야고

제주영주 2006. 3. 9. 12:43

 

 

 

 

★ 억새꽃 ★



살구빛 언덕에 걸쳐 놓은

너의 애태우는 그림자

끝자락이 붉어 슬프다



가을 편지들이

은빛 지느러미처럼

가을  들녘을 휘젓고 다니다

돌아오는 길목,


눈시울이 붉어지며

기다리는 마음은

들국화도 아니고,

개망초도 아닐 것이다


너를 닮은

꼭 너를 닮은

억새꽃이다

 

 

푸른 가을하늘에 피어난 야고

▲ 야고는 보통 억새 뿌리에 기생하고 양하와 사탕무 뿌리에도 기생합니다.


 가을에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입니다. 풍선처럼 부풀어가는 가슴, 가을 하늘 모퉁이라도 붙잡고 떠나고 싶은 마음에 길을 나섰습니다.

 톡 톡 입을 벌려 파란 가을 하늘을 한 입 베어 물면 쏟아져 내리는 풍요로움 속에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생명의 꽃이 피었습니다. 보고 싶다 하여 볼 수 없는 너, 때가 되어야 만이 볼 수 있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 얼굴을 보여주는 기쁨, 황홀한 기쁨입니다. 억새풀 틈에 고개 숙인 채 살며시 피는 야고는 어쩜 슬프기까지 합니다. 억새뿌리의 영양분을 먹고살아 가는 야고는 밉지가 않으며 어여쁘기만 합니다.

 애처롭게 피어 바지 끝자락을 붙잡는 야고를 맘껏 찍어주고 돌아와서도 내내 풍선처럼 가득 찬 행복감을 맛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자그마한 식물이 이렇게 황홀하게 만들 줄이야. “행복이란 바로 이런 거야, 나의 것을 나눠 줬을 때 행복은 두 배로 커지는 거야" 억새가 살며시 속삭입니다.

 가을로 줄달음치는 가을의 여인, 억새꽃이 곱기만 합니다. 홀씨를 바람결에 훨훨 날려 보낸 후 텅 빈 가슴으로 가을 들녘, 겨울 들녘을 외롭게 슬프게 울어대는 억새꽃은 슬픈 여인을 보는 듯하지만, 구월의 억새꽃은 새악시 볼처럼 수줍게 피어납니다. 그래서 늘 이맘때가 제일 예쁩니다.


 자줏빛 물감을 솔솔 풀어 놓은 듯한, 억새꽃이 만발하게 피어 오고 가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억새는 마음도 예쁩니다. 억새뿌리에서 기생하는 야고를 마다하지 않고 자기의 양분을 나눠주는 마음씨 고운 억새가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타인에게 자기의 양분을 마다하지 않고 나눠 주고 있을까요.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도 억새처럼 타인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나눠 줄 수 있는 풀꽃 같은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복이란 바로 이런 거야. 나의 것을 나눠줬을 때 행복은 두 배로 커지는 거야" 살며시 속삭이는 억새처럼 우리도 행복을 두 배로 키워가요.

 


2004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