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그리고 나

당산봉

제주영주 2006. 3. 9. 13:38

 

 

청보리밭, 물결처럼 '출렁'…환장하게 봄이 무르익다.

고산 당오름, 저승문, 저승사자, 차귀도



▲ 청보리 숨결이 들려오는 4월의 당오름

 보리장나무 열매가 붉게 타오르고 태양은 서쪽으로 가로질러 쪽빛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 끝자락으로 달려가고 있는 오후 무렵, 고산 당오름으로 향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달려갈 수 있을 만치 가까이 다가와 있는 차귀도는 그 아름다운 섬의 비밀이라도 벗겨 내릴 듯합니다.

 해안 절경이 펼쳐지는 고산 당오름으로 오르면, 슬피 우는 황금빛 풀피리 소리로 마음을 적셔 내리기 시작합니다. 황금빛 띠물결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쪽빛 바다로 치닫는 금빛 물결을 지나 가파른 퇴적암층의 암벽을 내려가면 저승으로 가는 저승문이 있습니다. 저승문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퇴적암층이 해식 절벽으로 되어 있어 접근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늘보다 더 선명한 하늘보다 더 고운 쪽빛 바다가 열리며 수심이 깊은 바닷속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며 또한 퇴적암층이 얼마나 고운지 바다와 어우러지는 풍광이야말로 숨겨진 비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승 가는 날을 알 수 없듯이 저승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퇴적암층의 암벽에는 커다란 화석처럼 자연의 손길로 파인 곳이 있으며 또한, 저승문 곁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는 저승사자처럼 우직한 채로 바다만을 바라보며 외로이 서 있습니다. 달그락 달그락거리며 어루만져 내리는 바닷속의 비밀이라도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로운 저승사자 머리 위로 바닷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지만 외로운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살결 속을 헤집는 바닷속 언어의 내음에 취해 굳어 버렸는지 저승사자는 멍하니 바다만을 향해 바라보고 있습니다. 달그락 달그락거리며 바닷속 언어를 끄집어내듯이 잔잔히 들려오는 저승사자와 저승문을 지나 다시 이승으로 가는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황금빛 말갈기를 휘날리며 안장도 없는 말잔 등을 타고 아름다운 금빛 풀피리 소리 들려오는 아름다운 이승의 길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 생명력이 넘쳐나는 4월의 보리밭에서 들려오는 청보리 숨결이 들려옵니다.

 아, 싱그러운 청보리 숨결 소리에 4월의 길은 시작 됐습니다. 싱그러운 청보리 숨결 소리로 문을 여는 사월의 하늘에는 제비들이 집을 짓느라 분주합니다. 들녘은 일찍이 여기저기서 꽃을 피우느라 분주해지고 농부의 손길도 어부의 손길도 분주해지는 4월입니다.

 4월의 밤하늘은 등불을 켜지 않아도 환해지는 4월입니다. 잔인한 4월이 아니라 피비리내나는 4월이 아니라 암울했던 4월이 아니라 싱그러운 청보리 숨결로 스며드는 싱그러운 4월이기를···.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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