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 그윽한 한라산
산은 언제나 말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늘 그 자리에 있어 찾아갈 수 있는 산,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을 부활시키는 산, 변함없이 반겨주는 산, 언제든지 어머님의 품속처럼 안겨들 수 있는 산, 초록 물결이 일렁이는 산속으로 젖어든다.
나도 하나의 나무로 또는 하나의 꽃으로 풀꽃향기를 뿜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초록이파리 물결치는 유월의 한라산에는 어떤 향기로 가득 메우고 있을까? 하늘을 향해 나비처럼 날개를 펴는 산딸나무의 꽃향기를 맡으며, 초록 숲길을 걷는다. 무성한 이파리 위로 하늘을 향해 하얀 꽃잎이 펼쳐져 있는 산딸나무의 꽃을 흔히 보았을 것이다.
꽃이라 생각할 만큼이나 아름다운 하얀 꽃잎은 잎이 변해서 만들어진 꽃받침이다. 가운데 초록색의 둥그런 부분이 진짜 꽃이다. 누가 보아도 분명히 꽃이라 할 만큼이나 가짜 꽃으로 치장을 하고 있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바람에 팔랑거릴 때마다, 마치 나비가 내려앉아 있는 듯하다. 벌과 나비만을 유혹하는 것은 아니다. 산을 찾는 이들의 가슴속에 나비처럼 유혹하며 아름다움을 심어준다. 곱게 물든 가을이면 꽃이 진자리에 빨가니 탐스러운 딸기가 익어간다. 그래서 산딸나무라 부른다.
산딸나무의 향기가 차츰 멀어지자 함박꽃나무 향기가 풍겨온다. 함박꽃나무는 앞을 다퉈 꽃을 피우지 않는다. 꽃이 지는가 하면 또 다른 꽃봉오리를 활짝 열려 환한 웃음으로 안겨 온다. 요란스러운 모습이 아닌 서서히 탐스럽게 안겨 오는 우리의 꽃, 함박꽃나무는 산을 찾는 이들의 가슴속에 맑고 깨끗한 정서를 안겨준다.
꽃향기를 맡으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삼각봉이 코앞이다. 잠시 쉴 겸 앉았는데 화려한 매발톱꽃이 피어 반긴다. 꽃의 뒷부분을 보면 매의 발톱처럼 오므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발톱을 연상할 수 있다. 매의 발톱을 닮았다 하여 매발톱이라 부른다.
꽃향기를 맡아보는 습관이 있다. 꽃을 예쁘게 담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꽃향기까지 담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꽃을 보는 순간 꽃향기가 풍겨 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자기만의 기억 속의 향기일까. 아니면 꽃을 사랑하는 마음의 향기일까. 노란 꽃잎 속에 코를 가까이 대고 맡아보니 상큼한 레몬 향기가 풍겨온다.
이렇게 등산로에서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어여쁜 매발톱꽃을 담고 나서 용진각 대피소로 발길을 옮긴다. 용진각 계곡 주변에는 은은한 향기가 풍겨온다. 은색의 꽃,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향기로 눈길을 끄는 꽃나무, 보리수나무다. 보리수나무를 보면 석가모니가 떠오르고 슈베르트의 ‘보리수’ 가곡이 떠오른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 찾아온 나무 밑-
석가모니가 보리수 밑에서 해탈한 나무는 ‘보오나무’라고 한다. 보리수나무와는 전혀 다른 나무다. 보리수나무를 볼 때마다 석가가 떠오르는 이유는 ‘보리수’ 가곡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보리수나무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리수나무의 꽃향기는 은빛의 향기라고 할까.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 산바람의 날개깃으로 다가와 단꿈을 꾸게 한다.
단꿈 속으로 다가온 꽃은 큰방울새란이다. 보통 난 종류는 숲속 그늘에서 자라는 데 비해 큰방울새란은 습한 풀밭에서 자란다. 나른한 햇살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며 큰방울새란 꽃잎을 피워냈을까. 발길을 멈추게 하는 꽃, 큰방울새란이 풀섶 사이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며 반긴다. 어찌나 반가운지, 행운의 날이다. 힘든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는 것은 어여쁜 꽃들이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면서 내년에도 또 내년에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2005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