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그리고 나

가을 산이 주는 선물

제주영주 2006. 3. 9. 14:29

 

가을 산이 주는 선물 한아름 가슴에 안겨오다.


 한여름을 싱그러운 이파리로 드리웠던 산입니다. 더러는 단풍이 되지 못한 채 바람에 실려 쓸쓸한 마음 한 귀퉁이에 자리 잡기도 합니다. 서늘한 갈바람에 산 열매는 탐스럽게 익어가며 나무마다 가을색감으로 서서히 물들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산나그네를 맞이하기 위해서 마련해 놓은 것은 아닐 테지만, 올망졸망 매달린 으름은 먹음직스럽게 입을 크게 벌려 산새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지만, 한두 개정도 따서 맛을 보았습니다. 가을 노을빛처럼 붉게 물든 탐스러운 산딸나무 열매랑 한입에 쏙 들어갈 만큼의 크기로 주렁주렁 매달린 다래를 주섬주섬 따먹으며 풍성한 가을 산속으로 가을 들꽃을 찾아서 떠났습니다.


가을볕이 뒹굴고 있는 가을 산에는 조릿대 틈 사이로 가을마중 나온 가을 들꽃이 반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을 하늘을 향해 나팔을 불고 있는 꽃, 용담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을볕 한아름 안고 피는 용담꽃은 해질 무렵이면, 파란 가을 하늘을 훔치고는 꽃잎을 꼭 다물어 버리지요. 꽃잎이 활짝 피면 파란 물이 주르륵 흐를 듯한 꽃잎을 열어 놓습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보다 더 푸른 마음을 지닌 꽃에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꽃의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혼자서 가질 수는 없지요. 꽃은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정화 시켜주는 美를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혼자서 독차지한다면 또 다른 이들에게 나눠줘야 할 아름다움과 벌과 나비에게 나눠줄 꿀을 혼자서 독차지하는 셈이지요.


들꽃은 그저 있는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보는 이가 없어도 찾아올 이가 없어도 들꽃은 바람을 벗삼아 구름을 벗삼아 산과 들에 피고지고 있지요. 들꽃은 잘 꾸며진 궁전에서 자유를 잃은 공주이기를 원하지 않는답니다. 들꽃의 마음을 아신다면 들꽃을 위해 그대로 바라보기만 해주세요. 그저 눈인사를 나눠주길 바라지요.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물매화가 가녀린 꽃대를 세우고 총총히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군자(四君子)의 으뜸인 매화는 봄에만 피는 것은 아닙니다. 봄에는 설중매, 여름에는 돌매화, 가을에는 물매화가 핍니다. 가녀린 줄기 끝에 한 송이씩 눈처럼 흰 꽃잎이 가을 하늘을 이고 활짝 피어납니다. 꽃잎 안을 들여다보면 이슬방울이 맺혀 있는 듯 작은 진주를 달고 있는 듯 수수하면서도 우아합니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헛수술입니다. 진짜 수술에는 밥알 같은 하얀 꽃밥이 달려 있습니다. 물매화는 꽃도 이쁘지만, 사랑스러운 잎이 가녀린 줄기를 꼿꼿하게 받쳐들고 있습니다.


가을향기 물씬 풍겨오는 꽃은 바로 국화가 으뜸입니다. 눈개쑥부쟁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연보랏빛 꽃물결로 수를 놓고 있습니다. 보랏빛 꽃물결속에 유독 흰빛이 반짝이며 동공 속으로 머물고 말았습니다.

 

눈처럼 고운 빛, 청초한 한라구절초가 외롭게 피어 가을 산길을 홀로 걸어가듯이 나풀거립니다.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한라구절초는 한라산을 지키기 위해 찾아오는 이 없어도 구름을 벗삼아 바람을 벗삼아 외롭게 피었습니다.


이렇게 가을 들꽃은 쓸쓸한 갈바람에 홀로 노래를 하며 산을 타고 오름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가을 들꽃은 한라산에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서서히 오름마다 가을 들꽃으로 수를 놓게 됩니다. 시월이면 오름마다 가을 들꽃으로 만발하게 피어날 것입니다.


흰한라부추 너머에는 가을향기를 가슴에 가득 담아 넣는 그들이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가을향기를 꺼내 책갈피 속에 넣거나 찻잔 속에 가을향기를 담아 넣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가을향기가 머물 것입니다.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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