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야생화 1월
- 수선화 향기 그윽한 제주-
제주는 사계절 아름다운 들꽃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쳐도 청초하게 피는 들꽃이 제주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납니다. 겨울이 시작되면 들꽃을 쉽사리 만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제주는 특별합니다. 바닷가 주변에는 왕갯쑥부쟁이를 비롯하여 샛노란 감국이 나그네의 마음에 포근함을 안겨주며, 올레길을 돌아서면 아기자기하게 피어나는 광대나물의 앙증스러움에서 시작하여 바람결에 실려 오는 그윽한 제주수선화의 아름다움에 제주의 겨울은 유난히 아름답습니다.
제주의 1월의 꽃을 꼽으라면 '제주수선화'가 으뜸입니다. 그 이유는 한해의 끝자락에서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하여 새봄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청초함이 묻어나는 제주의 들꽃이기 때문입니다. 은쟁반에 금잔을 올려놓은 듯 하다 하여 '금잔옥대' 또는 '은잔옥대'라 칭하는 외래종 수선화하고는 꽃 모양새부터 다릅니다. 제주수선화는 흰 꽃잎 위에 여러 개의 노란 짧은 꽃잎이 있으며 노란 꽃잎 사이에는 흰 꽃잎 솟아 있습니다. 노란 꽃잎은 암·수술이 퇴화하여 꽃잎으로 변한 것입니다. 수선화는 알뿌리의 비늘줄기로 번식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암술은 퇴화하여 기후조건에 맞게 진화됐습니다. 제주수선화는 화려하지도 않으며 그저 투박하니 수수합니다. 사면의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모진 바람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모습은 마치 제주의 해녀를 닮았습니다.
옛 선인들은 수선화를 가까이하며 그림과 글의 소재로 쓰기도 했습니다. 온갖 추위를 이기고 한겨울에 난처럼 맵시 있는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워 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제주수선화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 왔을 때 외로움을 달래며 사랑했던 꽃입니다. 흐드러지게 핀 제주수선화를 보고 추사는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로 제주수선화를 칭송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 이 죄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의 동쪽과 서쪽이 수선화로 가득하지만, 움막 속에서 초췌해가는 이 몸을 돌아보건대 어찌 이것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까? 눈을 감으며 그만이거니와,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밀려드니 어찌하면 저 아름다운 수선화 융단들을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합니다. 또 보리밭에 많이 나는 까닭에 마을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호미로 캐어버리고는 하는데, 캐내도 다시 나기 때문에 마치 원수 보듯 합니다. 사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
추사는 사람들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제주수선화를 자신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을 하여 더욱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돌담에 기대어 꽃을 피우기도 하고 가끔은 농토를 기웃거리다 주인 손에 무참히 버려지는 제주수선화를 어여쁘게 여긴 추사는 꽃을 해탈한 신선으로 묘사되기에 이릅니다.
一點冬心朶朶圓 한 점 겨울 마음이 송이송이 동그랗게 피었나니
品於幽澹冷雋邊 그윽 담담하고 냉철하게 빼어난 기품이라
梅高維未異庭切 매화는 고상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淸水眞看解脫仙 해탈한 신선을 맑음 물에서 정말로 보는구나
외롭고 지친 9년이란 유배생활 동안 제주수선화는 그 곁에서 말없이 고고한 자태로 그윽한 향기로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치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들꽃이란 강인한 인내력과 그윽한 향기로 아픔을 치유하기도 합니다.
제주에서는 이 꽃을 말의 마농이란 뜻으로 '몰마농'(제주어)이라 불렸습니다. 제주사람들은 생명력이 강한 이 식물이 부족한 농토에 발을 딛고 자라는 것을 싫어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진 바닷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척박 땅에서 내쳐도 흙 한 톨에 몸을 기댈 수 있다면 온 힘을 다하여 꽃을 피우는 제주수선화는 제주 전역에 피는 봄의 전령사입니다. 서쪽 일주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한경면 고산 일대부터 시작하여 산방산 일대까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제주수선화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향기는 진하여 그 곁을 지나는 옷깃마다 추사의 묵향이 묻어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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