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의 꿈

털북숭이 하얀 얼굴, 애기사철란

제주영주 2006. 7. 30. 20:52

털북숭이 하얀 얼굴, 애기사철란   
 
 
한라산이 그리웠습니다.
뭉게구름처럼 한라산 허리를 휘감기며 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일이 생겨서 정상을 향했던 마음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한라산은 가까이 다가와 앉은 듯 선명한 모습으로 훤히 모습을 드러내 보입니다.

하늘마저 청옥 빛으로 물들여 놓았습니다.
한라산을 향해 달음질치는 마음에 열광하는 태양은 불을 지피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가라고 태양은 하늘 한가운데서 뜨겁게 열광합니다.

정상을 향했던 마음을 접으면서 영실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아름다운 풍광과 아름다운 한라의 들꽃을 담을 디지털카메라와 고독보다는 여유로움을 배낭에 담았습니다.

모처럼 혼자만의 산행입니다. 혼자라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왠지 모를 쓸쓸함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릅니다.

구름패랭이꽃의 인사를 받으며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층층 계단을 오르다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는 발밑을 내려다봤습니다.

발밑은 뭉게구름으로 싸여 인간 세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나의 친구, 내가 알던 이름들이 곳곳에 깃발처럼 펄럭 일터인데도 보이지 않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화창한 맑은 날씨 탓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시선을 너무 먼 곳에 두어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너무 가까운 곳에 두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적당한 거리에 시선을 둘 때가 가장 잘 보이는 법입니다.

그동안에 너무나 가까운 곳에 시선을 두고 살았나 봅니다.
적당한 거리로 평행을 유지하면서 걸었어야 했는데, 조급한 마음 탓인지 혼자만이 앞서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무거웠던 마음을 훌훌 털어놓고 가야합니다. 한라의 들꽃을 보고 있노라면 무거웠던 마음도 새털처럼 홀가분해 질 것입니다.

오르다 지치면 앉아서 발밑 세상을 내려다보기하고 구름다리처럼 연이어져 가는 뭉게구름꽃을 보아도 좋습니다.

끊임없이 꽃들이 줄지어 피어나는 한라산이 좋습니다.
눈에 익숙한 풍광이지만 늘 새롭게 탄생되는 풍광 속에서 만나는 들꽃마다 인사를 나누면서 천천히 올랐습니다.

모두가 소중한 한라의 들꽃들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산길에 뜻밖에도 귀한 애기사철란을 만났습니다.
사철란은 꽃도 예쁘지만 잎이 더욱 매력이 있는 상록성 난초입니다.

애기사철란, 붉은사철란, 자주사철란, 사철란, 섬사철란이 제주에 자생합니다. 이 중에서도 애기사철란만 조우를 못했던 탓이라 이번 여름에는 애기사철란과 만났으면 하는 자그마한 바람이 이뤄졌습니다.

하얀 꽃봉오리들이 총총 매달고는 들킬세라 키 큰 나무 밑에 숨어 있는 것을 내 눈에 들켰습니다.

애기사철란은 고산의 침엽수림 밑에서 자생합니다.
얼마나 작았으면 애기라는 말이 들어갈까 생각했는데, 사철란에 비해 그다지 작지는 않습니다. 사철란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애기사철란이라고 했을까하는 의문이 갔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철란에 비해 꽃이 조금 작으며 아가처럼 입을 옹알이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털북숭이 줄기에는 하얀 자그마한 꽃송이들이 예쁘게도 피었습니다.
애기사철란은 갓 태어난 아가처럼 뽀송뽀송한 털이 밀생합니다.

애기사철란 주변에는 애기사철란을 지키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개미 떼들입니다.

개미 떼 습격에 애기사철란과 제대로 눈맞춤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난생처음 조우하는 애기사철란이라 어떻게 버텨보려고 했으나 개미 떼 습격에 애기사철란과의 짧은 만남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산길에 내내 그려지는 털북숭이 하얀 얼굴들이 또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